절벽콩의 채팅은 이레가 읽는 동안에도 지워지지 않고 화면 위에 남아 있었다.
정소라는 회색문과 안내판을 번갈아 봤다.
"간판이 덮개라고요?"
"그렇게 말했어요."
"믿어요?"
"아니요. 확인할 가치는 있어요."
소라는 허리 주머니에서 얇은 동전을 꺼냈다. 안내판 옆 나사에 동전 가장자리를 대고 천천히 돌렸다. 녹슨 나사가 한 번 울었다. 라이브 채팅이 갑자기 빨라졌다.
파란말풍선: 와 디테일 소품 뭐야 절벽콩: 오른쪽 아래부터요. 위에 거 먼저 빼면 간판 기울어요
"진짜 아는 사람이네." 소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두 번째 나사를 푼 뒤, 소라는 이레에게 손짓했다.
"카메라 잡고 있어요. 떨어지면 당신 발등으로 가요."
이레는 삼각대를 접어 가슴에 안았다. 소라가 간판 아래를 잡아당기자, 낡은 철판이 벽에서 반 뼘쯤 떨어졌다. 그 뒤에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문이 나왔다. 손잡이는 없고, 안쪽으로 밀게만 되어 있었다.
문 위에는 이번에도 태그가 떠 있었다.
[시설 통로 / 선택지: 빛을 하나 남길 것]
[비용: 돌아보지 않는 사람]
"들어가요?" 소라가 물었다.
이레는 태그의 두 줄을 천천히 읽었다. 빛 하나를 남기라는 말은 손전등 하나를 켜 두라는 뜻일 수 있었다.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더 애매했다. 누군가가 뒤를 봐야 한다는 뜻인지, 끝까지 뒤를 안 봐야 한다는 뜻인지.
"제 손전등은 켜 둬요. 그리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뒤는 보지 마세요."
"또 설명은 반쪽이네요."
"반쪽만 확실할 때는 반쪽만 말해야죠."
소라는 문을 밀었다.
――
시설 통로는 계단이 아니라 오래된 배관 사이의 좁은 길이었다. 천장에는 손바닥만 한 비상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고, 그중 하나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소라는 앞에 섰고, 이레는 켜진 등을 지나칠 때마다 뒤쪽 벽을 확인했다. 태그는 전선 묶음과 밸브, 바닥의 물자국 위에 짧게 떴다가 사라졌다.
[밸브 / 위험: 먼저 잠그면 문이 닫힌다]
[비상등 / 비용: 불을 끄면 길을 잃는다]
"밸브 만지지 마요." 이레가 말했다.
"만질 생각 없었어요."
"그리고 이 불도요."
"이 정도 밝기로 길을 어떻게 찾아요?"
"찾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소라는 대답 대신 발을 멈췄다. 통로 끝에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 번. 멈춤. 다시 두 번.
이레는 휴대폰을 소리 쪽으로 돌렸다.
"누구 있어요?"
소라가 손을 들었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통로 안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사람 있어요? 여기 문이 안 열려요!"
채팅창에 물음표가 쏟아졌다.
파란말풍선: NPC 연기 잘한다 절벽콩: 저쪽은 원래 막힌 곳인데
이레는 소라 쪽을 봤다.
"실제예요."
"알아요."
소라는 짧게 대답하고 통로 끝까지 달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상등이 닿는 선까지만 움직였다. 거기에는 철망문 하나가 있었고, 그 너머에 젊은 남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 보호대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지만 피를 흘리거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름이요." 소라가 물었다.
"한세진이요. 친구 둘이랑 들어왔는데, 정면 계단에서 갈라졌어요. 저는 문 찾다가 여기로 떨어졌고요."
이레의 시선은 철망문 옆 전기 상자로 갔다.
[철망문 / 선택지: 안의 사람에게 빛을 넘길 것]
[비용: 바깥의 길 하나]
세진 뒤쪽은 어두웠다. 그가 들고 있는 휴대용 등 하나가 유일한 빛이었다. 이레가 통로의 비상등을 끄면 이쪽 길을 잃고, 세진에게 등을 넘기면 철망 안쪽이 드러날 수 있다. 태그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만 했다.
"세진 씨, 등 바닥에 놓고 철망에서 세 걸음 떨어지세요."
"문 열어 주는 거죠?"
"열 수 있는지부터 볼 겁니다. 소라는 제 손전등을 들고, 제가 비상등을 끌게요."
"그러면 여기 어두워지잖아요." 소라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당신 손전등 불빛은 남아요. 태그가 빛 하나는 남기라고 했어요."
"태그요?"
이레는 펜을 너무 세게 쥐었다. 소라의 눈이 잠깐 이레 손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라는 그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좋아요. 제 손은 어디에 두죠?"
"등을 세진 씨 쪽에 비춰요. 문이 움직이면 바로 멈추고요."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는 비상등 아래의 스위치를 내렸다.
통로의 빛 하나가 꺼졌다.
철망 너머의 어둠이 세진의 발밑에서 물러났다. 손전등 빛이 닿은 벽 아래에 낮은 잠금장치가 드러났다. 겉으로는 녹슨 판처럼 보였던 부분이었다. 그 위에 태그가 새로 떴다.
[잠금장치 / 선택지: 안쪽에서 밀고, 바깥에서 고정할 것]
"세진 씨, 왼손으로 저 판 밀어요. 소라는 이쪽에서 철망 잡고."
"제 손으로요?"
"당신이 안에서 해야 해요. 힘 주기 전에 말해요."
세진이 숨을 들이켰다.
"합니다."
판이 안쪽에서 밀려 나오자 소라가 철망을 붙잡았다. 금속이 한 번 크게 울었다. 이레는 손전등을 든 소라의 팔꿈치를 잡아 각도를 바꿨다. 잠금장치가 아래로 밀리고, 철망문이 사람 하나가 나올 만큼 열렸다.
세진은 바로 뛰어나오지 않았다. 이레가 먼저 말했다.
"천천히. 뒤 보지 말고, 소라 발만 보고 오세요."
세진이 통로로 나온 순간, 철망 안쪽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소라는 문을 밀어 닫고 세진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친구 둘은 마지막으로 어디서 봤어요?"
"정면 계단이요. 저는 그쪽 말고 빠질 길 찾으라고 해서…."
이레는 입을 다물었다. 정면은 처음부터 피하라고 말했던 길이었다. 세진의 친구들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아직 몰랐다. 오늘 이 길로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요. 나가서 관리국에 신고하고, 들어온 기록부터 확인해요."
"방송도요?" 세진이 휴대폰을 봤다. "이거 진짜 공략 방송이에요?"
채팅창이 잠깐 멈췄다.
이레가 대답하기 전에 소라가 이레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문 연 건 진짜였어요. 나머지는 나가서 물어봐요."
철망문을 등지고 몇 걸음 옮겼을 때, 뒤쪽 비상등이 차례로 꺼졌다. 처음에 남겨 둔 빛 하나가 마지막으로 흔들렸다. 소라는 손전등을 들어 이레와 세진의 발밑을 비췄다.
"이게 비용인가 봐요." 이레가 말했다.
"길 하나 버린다는 거요?"
"네. 들어올 때 지나온 길은 이제 못 쓸 겁니다."
"그걸 먼저 말했으면 좋았겠는데."
"먼저 말하면 세진 씨를 두고 돌아가자는 선택도 생기니까요."
소라는 세진을 가운데에 세우고 통로를 되짚었다. 시설관리과 간판이 있던 벽에 도착했을 때, 회색문 뒤의 틈은 이미 닫혀 있었다. 소라가 간판을 다시 밀어 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사 구멍도 매끈한 벽처럼 사라져 있었다.
절벽콩: 어? 간판 원래 저렇게 붙어 있었나 파란말풍선: 맵 리셋 연출까지 해 주네
이레는 화면의 채팅과 닫힌 벽을 번갈아 봤다. 방송으로 남은 건 사라지지 않았다. 간판이 움직였고, 통로가 있었고, 세진이 철망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다만 다음 사람에게 같은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세진은 닫힌 벽 앞에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철망을 붙잡았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공략 하나를 얻고, 탈출로 하나를 잃었네요." 소라는 닫힌 간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세진 씨는 나왔어요."
"그건 맞죠."
소라는 턱을 한 번 내렸다. 하지만 이레의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덧붙였다.
"다음에는 그 선택도 방송에서 말해요. 보는 사람은 결과만 보면 쉬운 길인 줄 아니까."
그 말은 이레가 가장 듣기 싫던 종류의 충고였다. 맞는 말이라서 더 그랬다.
세진은 구조 접수 화면을 껐다 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저, 다음에도 방송 봐도 돼요? 길드 공략은 돈 내기 전까지 뭘 알려 주는지 모르잖아요."
이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공짜로 알려 주겠다고 약속하면, 누군가는 그 말을 믿고 위험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오늘처럼 늦는다.
"봐도 됩니다. 대신 제 말만 믿지는 마세요. 현장에 있는 사람하고 같이 확인해야 해요."
세진은 그 대답을 듣고도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말할게요. 들어가라고 추천하는 게 아니라, 들어갔으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보라고요."
이레는 그 문장을 속으로 한 번 고쳤다. 추천이 아니라 기록. 정답이 아니라 멈출 자리. 방송 제목 아래에 다음부터 적어 둘 문장이 생겼다. 그 정도는 약속해도 됐다. 적어도 오늘은.
――
시설 통로를 빠져나온 뒤, 세진은 출입문 밖에서 관리국 구조 접수 번호를 눌렀다. 소라는 옆에서 그의 친구들 인상착의를 받아 적었다. 이레는 삼각대를 다시 세우지 못한 채 화면만 보고 있었다.
시청자 수는 열아홉으로 늘어 있었다.
파란말풍선: 방금 철망 열리는 타이밍 뭐였음 절벽콩: 나사 위치 맞았죠? 저 문은 예전에도 비상용이었어요 한세진: 저 방송 주소 커뮤니티에 올려도 돼요? 정면 계단 들어갈 사람들 봐야 할 것 같아서요.